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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북한의 핵개발 역사와 핵무기 보유 목적

북한의 핵개발 역사와 핵무기 보유 목적

김 동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 전 북한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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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북한의 핵 개발 및 핵무기 보유 과정

  북한의 원자력 기술 개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초기 핵 연구는 도상록, 한인석, 이승기 등 월북 과학자들이 주도했

. 일본 교토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도상록(1903~1990)은 해방 이후 서울대학 교수를 지내다 1946 5월 월북, 김일성종합대학 주임교 수를 맡았다. 한인석은 해방 이후 연세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월북한 뒤 김 일성종합대학 고급 교수를 맡았다. 그리고 한인석은 모스크바에서 장기 간 첨단물리학을 배우고 돌아와 1960년대 대량의 핵물리학 관련 논문 들을 발표했다. 전남 담양 출신인 이승기는 1939년 교토대학에서 응용화 학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학 공과대 학장으로 재직 중 6.25때 월북했다. 이승기는 1961년 비날론 생산을 주도했고 영변원자력연구소장 (1967)과 과학원 함흥분원장(1987)을 지내는 등 김일성 시대의 북한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북한은 이미 1950년대부터 김일성의 지도하에 핵개발을 최우선 국가전 략으로 채택하고 구동독과 소련의 천재 핵과학자들을 대거 영입하여 중 단 없는 핵개발에 집중해 왔다. 현재 북한은 핵개발 핵심 고급인력 200명을 포함, 전문인력 3,000, 기술인력 6,000명 등 총 1만여 명의 핵 과학 인 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북한의 우라늄 매장량은 2600만 톤 정도로 중국대륙의 7만 톤에 비하여 얼마나 많은 우라늄이 매장되어 있는지 쉽게 비교할 수 있다. 1955년 가을 북한의 과학원은 핵 물리학 관련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전문 과학자들이 동유럽에서 개최 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1956년 북한은 모스크 바 인근 드브나(Dubna) 연구소가 다국적 원자력연구센터를 설립하는데 참 가, 소련과 원자력협력협정을 체결했다.

  1961 9월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김일성은 원자력의 평화 적 이용을 위한 연구 개발을 추진하도록 역설했다. 이에 따라 1962년 부터 평안도 영변지역의 산악지대에 핵개발 연구기지 건설사업을 시작했 다. 그리고 1965년에 평안도 영변의 핵개발 연구단지에 IRT-2M 연구 용 원자로 건설 완공했다. 1970 11월의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도 김일성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문제를 재차 강조했다. 김일성은 일찍이

1970년대 초반부터 핵 개발을구상하고 필요한 인재 육성에 주력했

. 소위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투사동료들 중 우수한 자제들과  젊고 실력 있는 인재들을 선발하여 구소련 등에 유학을 보내 핵물리학과 관 련한 지식들을 공부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에 핵 물리과를 신설하 고 유능한 학자들로 교수진영을 꾸려 운영했다. 핵물리학 분야의 핵 심 교육기간은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성이과대학이다. 평성이과대학은 핵 물리학, 화학, 수학 등 다섯 개 학과로만 구성된 특수대학이다. 이 외에도 김책공업대학, 강건군관학교, 평양고등물리학교, 평양제일중 학교 등도 물리학 연구 인력들을 배출하는 주요 교육기관이다. 초기 에 평화적 목적으로 시작된 원자력 이용 계획이 적어도 1970년대 초반부터는 핵무기 개발 계획으로 본격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부터 북한은 정련과 변환 그리고 핵연료 제조와 같은 핵연료주기 개발에 연구의 초 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1973년부터 평안도 영변의 핵개발 연구단지에 IRT-2M 연구용 원 자 로 에 필요한 농축도 10퍼센트의 핵연료가 소련 으로부터 제공됐다. 1974년 북한은 IRT-2M 원자로를 개량해서 농축도 80퍼센트의 핵연료를 사용할 수 있게 영변 핵개발을 추진했다. 구소련의 드브나(Dubna) 연구소에서 핵물리학을 연수한 핵 전문가들을 영변지 구에 파견하여 연구사업 진행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핵연구는 일정한 규 모를 갖추게 된다. 1979년에는 자체 기술로 핵 반응로 건설에 착수해 1986년 정식 운전을 시작했다.

  북한은 1985년에는 영변 핵시설에 사용한 핵 연료봉을 써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실험실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북한은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영변 핵시설 내부의 모래밭에서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고폭 실험을 130여 차례 실시했다. 1980 7 5MWe 원자로의 설계에 착수, 1987 12월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5MWe 원자로는 1950년대 중반 프랑스 가 개발했던 G1형 원자로와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원자로로 분 석된다. 이 원자로의 주요 목적은 플루토늄 생산에 있으며 최대 가동 시 연간 11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 된다. 1980년대 초 김정일은 인민무력부와 과학원, 원자력총국에 원 자력의 군사적 이용 가능성을 연구하며 핵무기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데 대한 지시를 하달했다.

  1990년대 초 김정일은 외무성과 대외경제 기관들에 2억 달러 정도 만 있으면 핵무기 1개 정도는 생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외 국 은행들로부터 차관, 대출형식으로 시급히 2억불의 현금을 마련할 데 대한 지시를 하달했다. 이 지시에 따라 1993년에 이태리 주재 북한 대사 관이 처음으로 이태리 정부로부터 1억불의 장기 차관을 받아 내는데 성공 했다. 1990년 들어 북한 원자력총국 최종선 대변인도 원자력총국의 과 학자들이 5MWe 원자로의 훼손된 핵 연료봉에서 핵무기의 원료인 플 루토늄 추출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김정일은 핵무기 개발사업을 조선로동당의 기본 국방전략으로 추진했다. 김정일은 조선로동당 내 종전 기계사업부를 군수공업부로 개칭하고 기본 과업으로 핵무기 개발을 지시했다. 황 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김정일이 당 중앙위 과학교육부 제1부부장

(1986.6)이었던 박송봉을 당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1998.10)으로 임명 하고 핵무기개발 추진을 직접 지휘하도록 했다고 증언했다. 박송봉

(1932. ~ 2001. 2. 20) 군수공업부 1부부장은 만경대혁명학원 졸업생이며 구소련 유학(1951~57)생으로서 당 중앙위 부부장 (1970년대), 당 중앙 위 후보위원(1981.10), 당 중앙위 위원(1983.6)으로 북한의 핵무기개발 을 완정한 실세였다. 군수공업부가 당내 서열 2위로 급부상 한데는 박송 봉의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동되는바, 당 조직지도부 다음으로 승격시키 면서 그 위상을 제고했다.

  이때로부터 김정일은 당 군수공업사업을 핵 개발, 장거리미사일 개발로 전환하며 그 총책임자로 박송봉을 임명하고 그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김정일은 박송봉을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하고 핵무기 개발사업에 전병호 당 군수담당비서도 일정부문 보안상 이 유로 간섭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김정일은 군에 대한 현지시찰 시 동행하는 군 고위 장성들에게도박송봉 제1부부장에게 잘 보 여야 해!”라고 하며 그의 위상을 제고했다. 김정일은 핵무기개발 추 진에당 외화자금을 무제한 쓰도록 하였으며, 1990년대 제1차 북핵 위기가 터지자 북한군 4개 여단을 박송봉의 휘하에 배속시켜 핵시설 은폐를 지시했다.

  한편, 김정일은 박송봉의 지휘에 북한군 총정치국과 총참모부가 적극 협력하도록 지시하였다. 박송봉은 당시 131지도국이라는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군수공업부 핵무기개발사업을 추진하는 전담부대로 활용했 다. 131지도국은 원래 인민보안성 공병여단이었으나 핵무기개발 전담 부대로 승격되면서 일반 여단 규모의 1.5배로 확장됐다. 부대장은 지 도국장으로 불리고 상장 급이며 지도국 산하에부흥무역회사가 존재 한다. 박송봉 제1부부장은 외국과의 핵관련 기술교류 및 참관을 위해박사로 위장하여 해외의 수많은 나라들을 방문하면서 핵무기 관련 기술들을 빼내갔다.

  김정일은 박송봉이 제기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는바, 특히 그가 요구하면 외화자금을 당 재정경리부에서 보관하고 있는 김정일 비자금에서 지출하도록 특별히 지시했다. 박송봉은 이 외화자금으로 해외 출장 시와 세계 각 국 주재 대사관이나 대표부들에 나가있는 무 관 및 특수요원들에게 보내 핵무기개발 관련 수많은 특수 자료들을 수 집했다. 박송봉 1부부장은 파키스탄에 무상군사지원을 제공하였으며, ‘핵 아버지로 불리던압들 칸에게 막대한 외화자금을 지불하고 해당 핵 기술을 뽑아오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송봉은 이 막대한 외화자금을 이용하여 수백만이 굶어죽던고난의 행군시기에 구소련과 우크라이나의 핵무기개발 전문가들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구소련과 우크 라이나 핵무기개발 전문가들이 가족들과 함께 체류한 숙소는 고려호텔 뒤 바로 100m 떨어진 25층짜리  인민무력성 초대소 건물이었다. 구소 련과 우크라이나 핵무기개발 전문가들은 김일성이 사망한 해인 1994년 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북한 핵전문가들과 협력하여 핵무기개발을 최 종적으로 완성했다.

  현재 북한의 핵무기 보유량은 다음과 같다고 추정된다. 미국의 대북 정보기관들은 현재 북한이 핵탄두를 20에서 많기는 50기까지 보유하고 있 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미국본토인 워싱턴과 뉴욕까지 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도 성공한 것으로 예측 하고 있다. 스웨덴 군축평화연구소는 북한이 현재 핵탄두를 30기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스웨덴 군축평화연구소는 북한 이 이미 핵탄두의 소형화, 경량화를 마쳤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비공개 정보로는 박송범 제1부부장이 2000년 초반에 벌써 자기 지인 에게핵개발은 성공하였는데, 문제는 부피를 소형화 하는 것이 급선무 이다.”라고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6년이 지난 2006 10 9일에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강행 한 것으로 보아 핵탄두의 소형화,  경량화는 이미 옛일인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은 이미 2000년대 초반에 핵개발을 선행시켜 놓고 적당한 시점들에서 핵실험들을 감행하여 국제적 여론들을 유리하게 유도 및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6 1 6일 오전 10 30분에 감행한 수 소탄 실험도 이미 기술을 개발해 놓고 미국과 남한을 압박할 목적 으로 터트린 엄밀히 계산된 대미, 대남 군사적 도발행위로 판단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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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북한의 핵무기 보유 목적

  첫째,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대미, 대남 협박용이라고 분석된다. 지금까 지 북한은 핵무기 카드를 휘두르며 북한의 비핵화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맞바꾸는 조건으로 제시하고 막대한 경제적 보상을 요구했 다. 이는 북미간의 평화협정을 체결한 이후 불가침 조약을 맺는 조건으 로 남한에서의 미군을 철수시킨 다음 베트남 식의 적화통일 야망을 실 현하려는데 기본 목적이 있다고 평가된다. 향후 CVID를 통한 비핵화를 추구하는 미국과, '행동 대 행동'에 기반을 둔 단계적 비핵화 프로세스와 함께 그에 따른 미국 측의   상응 조치를 바라는 북한이 첨예한 신경전을 벌릴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북한은핵 비확산내지핵 폐기에 앞서 바이 든 미 행정부가불가침 조약”, “대북 적대시 정책포기와 관계개선을 위한 실천적인 대안들을 먼저 제시하라고 주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나아가정전협정평화협정으로 교체하는 문제, 북미 간 외교 관계 수립 문제도 강하게 들고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 북한은 핵무기 보유가 북한독재정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최선 의 방안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분석된다. 지난 8차 당대회에서 김정은은 핵 과 미사일에 기반 한 우월한 국방력으로 한반도 정세를 주도할 뿐만 아 니라 조국통일도 실현하겠다는 노선을 채택했다. 향후 북한의 핵과 미사 일 능력이 더욱 고도화되어 갈수록 미국과 남한에 대해서는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보일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핵무기 보유를 과시하면서 김정은 3 대세습의 정통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북한주민들의 내부결속에 총력 을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

  셋째,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 대국들의 대 북 간섭 차단용이라고 분석된다. 김정일은 생존 시 외무성에 북한 간부들 이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해외출장 나갈 때 절대로 주재국 간부 들을 만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이유는 중국과 러시아의 대국주의자들 이 미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북한의 핵무기개발에 마구 간섭하고 개혁, 개방에 대해 함부로 훈시한다면서 의리도 없는 놈들이라고 비난했다. 특히 한반도에서 유사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보다도 러시아 것들이 제 일 먼저 후방에서 북한의 뒤통수를 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0년대 초반 박송봉 1부부장으로부터 드디어 핵을 보유하게 되었 다는 보고를 받고 김정일은대국주의자들의 내정간섭을 최종적으로 차 단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계속하여중국과 러시아 것 들이 우리의 내정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만족을 표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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